삶의 잔영/불교 & 절

부처님 금구설 니까야, 그리고 선불교

자작나무. 2015. 12. 26. 16:35

집주변에 작은 절이 있다. 주지 스님이신 범일스님은 출가 후 20 년 동안 공부하신 선불교의 수행방식 대신 초기불교 경전인 사부니까야에 따라 수행하고 법문을 하신다고 한다. 스님은 이곳에 자주 오진 않고 지리산에서 수행하고 있다고 한다.

 

니까야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것을 기록한 경전이라고 한다. 문제는 니까야와 우리나라 불교인 대승불교의 경전에 나온 불교 핵심 교리와 수행법에 작은 차이를 넘어 완전히 다른 내용이 많다는 점이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초기불교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전과 책.

 

                                    

            < 범일스님의 수트라 : 방대한 니까야를 축약한 책 >                    < 일묵스님의  이해하고 내려놓기 : 초기불교 핵심 내용 >

                                              

한국의 선불교에서는 참나, 불성, 아뢰야식, 본래면목, 공(空) 등의 깨달음과 직결되는 개념이 항상 법문이나 경전의 핵심 내용이 된다. 고결하고 경지가 높아, 감히 함부로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멀다.

 

그런데 부처님의 금구설(金口設-직접 설하신 법문)인 니까야에 참나, 불성, 본래면목, 공 이런 내용은 없다고 한다. 나아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말은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에서 스님들이 많이 언급하는 이 문구는 무의미한 단어의 나열이 된다.

 

니까야에는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연기의 법칙, 4성제, 8정도, 등이, 선문답하는 방식의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명료하고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영혼이 있냐 없냐 하는 문제도 그렇다. 조건이 갖추어지면 있다가, 조건이 소멸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일체는 무상하므로 변하게 되며, 그에 따라 결과도 다르게 생멸하는 것이다.

 

임종의 순간에 나타나는 재생연결식에 따라서 선처와 악처에 윤회하는 것이다. 윤회하는 주체는 항상 일정한 형체,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변하는 무상의 법칙에 따라서 그 자체도 찰나 찰나 변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 자아나 불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승경전과 부처님의 금구설이라는 니까야의 내용적 차이는, 이해의 관점에 따라서 양립이 가능한, 그런 수준을 넘어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가하여 참나를 2030년 찾아도 못 찾는 현실에서, 출가도 하지 않은 재가자가 참나를 추구하는 자체는 무모해 보인다. 더구나 돈오돈수 입장에서 보면 20 30 년을 또는 일생을 바쳐서 참나 하나를 추구하는 것은 의미가 퇴색되는 듯 싶다.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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