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대륙에서 불교의 쇠퇴
13세기에 들어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는데, 그 원인을 설명하는 여러 설이 있으며,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이슬람의 침공과 스님들에 대한 핍박, 불교의 힌두교화, 불교는 상류층 중심으로 민중에 뿌리를 내리지 못함 등의 원인으로 불교의 고향에서 불교는 사라지게 된다.
힌두교와 불교의 상호 영향
보살에 대한 초월적 신격화가 이루어지고,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등의 보살이 구원자로서의 위치에 자리한다. 천수관음보살은 힌두교 신의 모습과 거의 동일하다. 즉 힌두교의 신이 들어와서 불교화되고, 힌두교의 만트라(진언)가 불교화되는데 능업주, 신묘장구대다라니가 불교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가 사라지고 불교가 따로 존재할 필요가 없어져서 흡수된다.
힌두교와 불교의 관계
다만, 불교가 힌두교의 아류라는 입장은 성립되지 않는데, 초기에 불교의 중관사상과 유식학파가 생기고, 이 이론을 바라문교가 그대로 가져가서, 자기식으로 체계화한 것이 힌두교이다. 즉 초창기에 불교의 영향을 받는데, 이후에는 다시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힌두교의 다신사상이 민중에 깊숙이 뿌리내려졌는데, 불교의 보살사상이 다신사상과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중국의 불교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지고, 불교는 중앙아시아, 중국, 티벳에서 활발하게 이어졌다. 중국에서는 중국 문화의 영향과 함께, 화엄, 천태 등 중국 특유의 종파가 생겨난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중국의 불교 종파는 선종과 화엄이 주류를 이룬다.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핵심적 차이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분기되는 핵심에는 보살사상이 자리한다. 모든 부파의 경전에서 일찍이 불교적 수행에는 보살의 길, 붓다의 길(아라한의 길), 연각의 길이 정립되어 있었다. 대승불교는 보살의 길을 우월하게 여기고, 남방 상좌부를 중심으로 하는 아라한의 길을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불교의 확산, 변화 그리고 역사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종교적 신심은, 신비한 배경과 초월적 신상, 그리고 계속해서 안개처럼 피어나는 주변 이야기가 더해져야 스스로 신심 속에 젖어드는 경향이 있다. 객관적 진실보다 감정적 신심이 큰 역할을 한다.
불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은 특정 불교 종파의 가치를 훼손하거나, 신심을 떨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학문적 관점에서 역사를 관찰하고, 역사적 사실을 짚어보는 것이다.
사실적 흐름을 알더라도, 신심이 떨어지지 않기를.....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았을 때에도, 이 우주의 법리으로 작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를.....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아 중생들이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데 뗏목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을 알기를.....
연기와 사성제의 부처님 가르침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통해, 연기와 사성제의 진리를 중생들이 알아서, 고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알려주셨다. 종파에 따라 이런 저런 자기만의 입장을 내세울 수도 있으나, 핵심 가르침의 내용을 거스르지 않고 스스로 수행해서, 고의 바다를 건너는데, 또는 더 나은 삶을 이어가는데 도움이 되면 된다.
종교의 역사적 문화적 상호 작용
종교는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저런 다른 문화 그리고 타 종교, 또는 사상과 만나면서, 서로 흡수하고 영향 받으면서 이어진다. 이를 발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역사를 타고 흐르면서, 그 사회의 민중 속에 존재하는 사상체계 또는 종교적 철학과 어느정도 융화 되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 종교학 또는 사회 현상으로서의 종교를 얘기한다면, 이런 현상을 발전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에 영향을 주는 것은 결코 발전이 될 수 없다.
종교는 가르침을 설한 교주 또는 스승이 세상을 떠나면, 추가적인 내용, 법리, 개선방안, 사회적 현실을 감안한 방편, 보완책 등이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은 쇠퇴 또는 변형의 단계를 밟는다. 그리고 종국에는 외형은 그 종교인데 내용은 새로운 종교가 되어간다. 가장 원형으로 완벽한 불교는 부처님께서 계실 때 설한 법이다.부처님의 가르침인 불교는 이미 완전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무상정등정각)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인 이 우주 체계의 법칙인 연기와 사성제, 더 나아가 윤회의 가르침이 변형되지 않는다면, 대승불교를 믿던, 초기불교를 믿던 불교의 울타리에서 한 가족인 것은 사실이다. 다만 내용에서 너무 변형이 이루어진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는 개인의 신념에 따른 선별적 선택으로 해결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불교 그리고 사이비 불교
시대가 변했다든지, 과학이 발전한 시대라면서 핵심 내용인 연기, 사성제, 전생과 윤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든지 불교도 발전하므로 현대적으로 내용이 바뀌어야 한다든지 하는 입장이라면, 이는 불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초기 기독교와 현재의 기독교, 각 나라마다 다른 기독교, 대승불교, 초기불교, 티벹불교, 몽골불교, 한국불교, 고려불교, 현대불교, 조금씩 모두 다른 면이 있다. 부처님께서도 인도의 당시 사회에서 당시 인도인의 의식의 레벨에서 설하셨으니, 이것이 달라진다면 동일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법을 왜곡, 현혹하는 사람들이 많다
불교는 부처님 재세시에 완전한 가르침으로 완성된 것이고, 그 핵심 내용은 변할 수가 없다. 요즘에 유튜브에서 불교 마케팅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올바른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특히 초보 불교 입문자에게는 더욱 혼란스럽다. 나도 오랜 기간 여러 부류의 사이비 법사들의 주관적 해석의 모호한 말들의 홍수를 맞으며 잘못 이해한 부분이 많았다.
그 중에는 큰 세를 일으켜, 주류로서 많은 신도를 기반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대규모 불사도 하고, 언론 방송에 나와 좋은 말씀도 하고, 정치원로에게 조언도 하고, 생활도 신실하게 하고 올바른 사회인인 경우도 많다. 스님들은 경전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본인의 얘기를 마치 부처님 가르침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 너무 많다.
정법을 말하는 자, 비법을 말하는 자
사회에 해악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부처님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른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핵심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와 사성제 윤회를 기반으로 가르침을 올바르게 따르는가의 기준이 잣대가 되어야 한다. 이런 분들의 행위가 비록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해도, 불교적으로는 사이비 스님에 불과한 것이다. 정법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에 발전이라는 이름이 붙을 수 있지만, 실은 시대의 흐름에서 퇴보가 일어나는 현상의 전형일 뿐이다..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주는 목사, 스님, 신부에 대해서는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지만, 아무리 좋은 영향을 준다고 해도, 종교적 관점에서, 올바른 교리를 바탕으로 옮은 행위를 하는 스님, 신부님을 찾아서 따라가야 종교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황당한 본인의 변형 가르침으로도 얼마든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 꼭 알아야 한다. 정신적 안정감을 제공하고 금전적 댓가를 받는 자본주의적 종교 서어비스업일 뿐이다.
'사회적 명성 = 정법' 의 식이 항상 맞는 것이 아니며, '교세(신도 수) = 정법'의 식도 언제나 맞는 것은 아니며, '사회 공헌 = 정법'의 식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종교적 관점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는 불교든 기독교든 무당이든 반사회적이 아니고, 인간의 착한 본성을 계발하고 선을 따른다면, 안 믿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다. 종교적 관점의 이야와는 다르다 하겠다.
<일묵스님 유튜브 법문은, 명성있는 불교 학자들의 논문이나 학설을 기준으로 설하셨으며, 그 역사적 내용은 새로운 사실이나, 문헌의 발견 등으로 추가로 수정 변경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역사적 사실과 같은 맥락으로요. 스님 법문에 나오지 않은 제 개인적 견해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립니다. 일묵 스님은 종파에 대한 비판이 아닌 순수한 학문적 접근을 기본으로 설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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