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 그 느낌이 새로워지는 단어가 있다.
인연.
우리집 베란다에는 화단이 있는데, 그곳에는 엉성하게 자라는 풀들과 오랜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몇몇 식물들이 있다.
그중에 한해살이 식물이면서, 13년쯤 함께 살아가는 무우(엄밀히 갓)가 있다. 한번도 씨를 받아 뿌려 준다든지, 특별히 신경을 쓴 적이 없지만, 스스로 씨를 떨어뜨리고. 어느새 스스로 새싹을 내고 꽃대를 뽑아 올리고 노란 꽃을 피운다.
3월부터 꽃이 핀 무우가 다시 씨앗을 맺고 있다.
아마 내년에도 그 자리엔 노란 꽃이 맺힐 것이다.
2013년에 이 무우 꽃을 블로그에 올렸던 기억이 있어서 찾아본다.
인연이란 말의 의미가 점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이, 내가 나이들어가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60갑자를 거의 한바퀴 돌아 온 세월 속에, 온갖 인연의 씨앗들이 내게 뿌려졌고, 그 중에 어느 것은 발아해서 현재의 나의 모습으로 보여지고, 또 어느 씨앗은 가까운 미래에, 아니면 한량없는 미래에나 연이 닿아, 나의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이생에서 살아갈 시간이 살아온 시간보다, 어느덧 훨씬 짧아졌다는 것이며, 그 살아갈 시간의 질적 농도나 채도가 지나온 시간들의 그것들보다 화려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온갖 힘든 일들은 지나온 시간들 속에도 있었으니, 살아갈 시간들 속엔 얼마나 많은 인연의 씨앗들이, 선업의 모습 뿐이 아닌, 힘든 시간의 모습으로 현현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갈 시간을 아름답게 그려내야하고, 그 그림들 속에 어떤 또 다른 인연의 씨앗들을 뿌려, 채색할 것인가. 좋은 생각, 좋은 만남, 좋은 말을 의식적으로 찾아내어 행하는 것이 인위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노력에, 행운이 함께한다면, 그림을 그려나가기가 수월하지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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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무우꽃의 인연
베란다 화단 베란다 화단에 무우가 노란 꽃을 피운다. 5년 전 근처 산에 갔다가 무우 1포기를 가져다 심었는데 스스로 자라서 꽃 피우고 씨를 떨어 뜨린다. 다음 해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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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인연 닿은 많은 사람, 물건, 책, 생각 등이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젊은 시절 스치 듯 지나가버린 그런 것들에서 조차, (불교에서 말하듯) 간단하지 않은 인연의 끈이 이면에서 서로 얽혀 있다면, 우연이든 필연이든 모두 소중한 것이다.
그렇긴해도, 실상 내게 깊은 마음의 끈을 계속 이어오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다. 복잡해지는 것을 싫어해서, 사람과 쉽게 가까이 하지 않으며, 돈으로 얽히는 관계를 싫어하고, 출세한 사람의 그림자에 발 들이는 것을 꺼리는, 비사교적, 비사회적 퍼스낼리티가 유전적으로 내려오는지, 주변이 깨끗해서 내맘대로 살기엔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건가 ?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게 오랜 시간 인연 있는 사람들, 사물들이 있다. 내 책상은 딸이 국민학교 들어가면서 산, 수십년 지나 다 부서진 것이고, 내 넥타이는 회사 다닐 때 산, 15년 쯤 된 것이고, 내 가방은 20년 쯤 지나 모양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래 쓴다고 미덕이 아니다. 현대적 컬러의 생활 감각에 깔끔한 이미지로 늙어가도 좋겠다. 회사에서 남의 대리인으로 일하면서 월급 받던 때는, 고용인의 입맛에 맛게, 멋진 핏으로 그럴 듯하게 하고 다녀야했다. 단벌이어도 메이커에 근사한 옷만 고집했던 이유다.
오래 살면 20여 년의 시간을 이생에 머물것이다. 오랜 친구들, 오랜 물건들, 고향의 무너져가는 집, 어릴 때 놀 던 산과 들판의 모습이 떠오른다. 시골집 앞, 산밑 개울엔 지금도 어려서 잡던 그 가재가 산다. 삭징이(삭정이) 주워서 불 놓고, 개구리 뒷다리와 함께 구우면 붉은 색으로 변하던, 그 가재의 큰 발과 몸통.
인연이란 나의 근원에서 내게 울려오는 소리는 아닐까.
아무튼, 인연있는 모든 이들, 모든 것들이 행복하기를 빈다. 이 꽃피는 봄날에.
지난 주 토요일에는 시골 고향에 가서 부모님 산소에 유기농 비료를 뿌렸다.
빈약한 잔디가 풍성해졌으면 좋겠다.
집 주변엔 엄마가 심어 놓은 꽃들이 피어났다.
가는 날이 읍내 장날이다.
전염병에도 많은 사람이 장보러 나왔다.
실치를 오랜만에 본다.
좌판의 꼴떼기도 풍성하다.
꼴떼기. 이름이 심상치 않은 그대의 이름은 꼴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