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잔영/고향 & 어머니

산소 주변 정리 II

자작나무. 2020. 12. 13. 22:00

코로나 확진자가 1,030명이라고 합니다. 순식간에 천명을 넘어섰습니다. 노약자에게는 감염되는 순간,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고, 생사를 가를 수 있는 심각한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면역 체계가 강하지 못한 편에 속하는 우리는 걱정이 됩니다.

 

십이월 둘째 주 토요일인 어제에 이어, 오늘도 당진에 다녀왔습니다.

어제는 혼자 트럭을 가지고 가서, 산소의 소나무 몇 그루를 베어 내고, 정리했습니다. 아침 늦게 일어나서 밥도 먹지 않고 떠나, 당진 시내 마트에서 누룽지 1봉지를 사서, 산소 밑에 자리를 펴고 누름밥을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그릇에 물을 끓이고 누릉지를 넣었는데 금방 물이 다 흡수되어 다시 물을 넣습니다. 잠시 후에 뚜껑을 열어보니 또 물이 없고 양이 엄청 많아졌네요. 다시 물을 넣고, 이제는 물이 흡수 되기 전에 신속하게 먹으려고 서두릅니다. 그런데 먹고 있는 시간 동안, 코펠 속의 누름밥은 엄청 더 많아지네요. 그래서 남은 누름밥을 버릴 수 없어, 가지고 간 보온 도시락에 넣었다가, 점심으로 3시 쯤 그걸 먹는데, 꼭 개밥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은 다 흡수되었고, 밥알은 물에 불어서 무르고 커져서 흐물흐물한 개밥 같은데, 그래도 따뜻하고 산속 숲에서 혼자 먹으니 겁나게 맛있습니다.

 

마트에서 사골국물 1봉지와 강된장 1봉지도 샀는데, 이게 누름밥과 어떻게 먹어야 되는지 상호 매치가 되지 않았습니다. 사골국물은 그냥 끓여서 먹도록 된 줄 알았는데, 끓여보니 그냥 깨끗한 흰색의 국물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원재료 상태입니다. 조금 맛을 보니, 밍밍한게 약간 조미료 맛도 나고, 내 입에 맞질 않습니다. 생각하다가 그냥 쏟아 버리고 조금 남겨서, 그 국물에 강된장을 넣고 풀어서 다시 끓여, 맛을 봅니다. 혹시 하는 생각으로 그냥 해본 실험인데, 얼떨결에 맛이 아주 좋은 된장국이 되네요. 누름밥 한 숟갈에 된장국물 한 숟가락을 먹으니 건더기가 잡히지 않아서 뭔가 허전하고 이상하긴 한데, 그렇게 두번 똑 같이 물(누름밥)+물(된장국물) 형태의 식사를 치루고, 거창한 나무 몇 그루를 넘어뜨렸습니다.

 

 

 

 

 

오늘 12월 13일은 코로나 확진자도 많고, 눈이나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로 집에 머물까 하다가, 어제 본 시골집 마당 위쪽 감나무의 홍시가 생각나서, 그걸 딴다는 형식적 목적을 순간적으로 세우고, 또 당진엘 갑니다. 어디 갈만한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데 심심하고, 아무 목적도 없이 연일 같은 곳에 가기도 그렇고 해서. 이런 땐 근사한 목적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이를 합리화해야 머리에 부하가 걸리지 않습니다. 집사람도 집에 계속 있기가 답답한지 얼결에 따라 나섭니다.

 

키엘케고르가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인간과 더불어 권태를 창조했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권태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겁니다. 일이 많아 바쁠 때는 모르지만, 시간이 조금만 남아도 권태감을 느끼게 되고, 별에 별짖을 다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창조적인 일도 하지만, 요즘엔 더하여 인터넷이 확산되고 오락과 취미에서 터부시되는 선을 간당 간당 넘나드는 행위가 넘쳐납니다. 권태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참 인간다워 보이고,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아내는 오랜 시간 같이한 피아노와 더불어, 4년쯤 열심히 테크닉을 연마한 사진으로 시간을 타고 넘어, 권태로움 없이 지냅니다. 나는 시간이 남으면 몹시 심심함을 느낍니다. 늙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궁리해 보지만, 아직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감이래야 아주 작은, 별 볼품없는 감입니다. 그래도 맛은 괜찮습니다. 엄마가 단지에 넣어 두었다가, 내가 집에 가면 몇개씩 꺼내주던 그 홍시입니다. 주인 없는 감나무의 감들은 너무 물러서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리니 터지고 상처가 납니다. 심하게 터지지 않은 감이나 운좋게 온전한 모양을 한 감들을 주워, 헛간에 있던 낡은 플라스틱 그릇에 담았습니다.

 

집안에 있는 톱을 가지고, 나무에 올라가서 나무를 꺾으려고 하다가 톱이 너무 무뎌서 그냥 내려왔습니다. 빗물이 묻은 나무 표면이 미끄럽고, 특히 감나무는 가지가 툭 부러지는 습성이 있어서 조심하지 않으면 떨어지기 쉽습니다. 조금 따서 그릇에 넣은 감들은, 위에 얹혀진 감의 무게로, 밑에 깔린 감들이 문드러져서 터져버립니다. 더 쌓아 올려 놀 수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 따고, 애초에 세우지 않아도 되는 오늘의 목적 - 감 따는 일 - 은 달성한 것으로 간주 합니다. 

 

 

감따는 일을 끝내니, 비도 조금씩 떨어지고, 축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할일이 없습니다.

 

빈집에 들어가 보니, 문앞의 사랑방 구락징이(아궁이)가 눈에 띕니다. 아궁이를 보니, 어릴적 엄마가 적녁을 지을 때,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불쬐던 생각이 납니다. 생각난 김에 불이나 때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합니다.

 

이 사랑방은, 처음에는 안방, 웃방, 부엌 그리고 헛간 이렇게 지어진 흙집에, 시간이 지나 웃방 쪽에 건물을 잇대어 달아내 생긴 방으로, 아버지가 주무시고, 구락징이에는 쇠죽을 끓이거나 뜨거운 물을 끓이던 곳입니다. 헛간에는 소가 잠자는 곳으로 낮에는 밖에서 풀을 뜯게 주로 산에 매어 놓곤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집 앞쪽으로, 아랫 채는 없고, 사람키보다 조금 낮은 흙담이 둘러쳐져 있고, 그위에 이영을 엮어 올려, 흙담에 비가 새어들지 못하게 한 구조였습니다. 밖의 산 자락과 하늘이 훤히 보이고, 사시사철 변화해 가는 풍경이 그대로 방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달그림자와 소쩍새 소리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흙 담장 밑에는 토끼장을 만들어 몇 마리의 토끼를 길렀습니다. 책보를 던져버리고 토끼풀을 뜯으러 가는 것은 당연한 나의 일과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토끼장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도둑이 다녀갔습니다.  싸리나무로 엮어 흙담에 슬쩍 걸쳐놓는 사립문은 그냥 문이라는 표시였습니다. 그렇긴 해도 사립문의 그 형상은, 흑백의 사진으로 내 가슴에 시처럼 남아 있습니다. 아랫쪽 시멘트 블럭의 집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지어졌습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여자들은 뜨뜻한 거를 좋아하니, 집사람에게도 좋을 듯 했습니다.

 

방고래가 무너진 상태라 구들이 온전치 않아서, 불이 구락징이 속으로 빨려들지 않고 밖으로 나오면서, 연기에 눈물 콧물이 흐르지만, 어찌어찌해서 이제 제법 장작불이 살아나고, 숯에 붙은 불덩어리들의 비주얼이, 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듭니다.

 

구락징이 옆에 버너를 켜서 어제 먹다 남은 누룽지를 또 끓입니다. 오늘은 다행히 김치를 가지고 와서, 물+물의 형태로 먹지는 않습니다. 오늘의 식사는 (누름밥 + 총각김치 + 배추김치 + 구운햄)입니다. 내용이야 어떻든 맛있습니다. 몇시간을 아궁이 앞에 앉아서 불을 피우고, 집사람은 장작불 사진을 찍으면서 놀다가, 고풍리 지나 원평리 숲속으로 들어가서 임도를 걸었습니다.

 

 

 

구락징이 숯불에, 꺾어온 나뭇가지에 햄을 꿰어 굽습니다. 맛보다는 재미입니다.

 

 

 

연기를 뱉어내던 구락징이가 어느덧 활활 타는 나뭇가지의 불을 몸속으로 빨아들입니다. 따뜻하고 훈훈하고,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불꽃을 바라보는 순간이, 아무생각 없이 머리가 맑아지고 꼭 촛불 명상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감나무에 오르려고 나무벨 때 입는 작업복을 입었는데, 불 때기에도 마음편한 복장이 되었습니다. 

혼자서, 개마인의 개마고원 복장이라고 이름을 붙여봅니다.

 

 

 

내가 이집 안방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엄마가 노년까지 농사지으며 사시다가 요양원에 간 뒤로 빈집이 되었습니다. 둘째 형님이 퇴직하고 간간히 들려 앞밭에 작물을 심었었는데, 이젠 그만 한다고 합니다. 빈집이라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땐, 집이라고 생각이 들었었는데, 돌아가시니 집이란 개념이 전처럼 안방같이 따뜻하질 않습니다. 세월이 가고 이렇게 되나 봅니다.

 

그래도 이번 겨울엔 이곳에 와서 불 때는 일들이 많을 듯 합니다. 코로나가 계속 위험한 상태가 되면, 여기 와서 혼자 불이나 때고, 산소 나무 정리하고, 원평리 산길이나 헤매는 겨울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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