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잔영/고향 & 어머니

고향 가는 길

자작나무. 2015. 10. 19. 19:24

타지에 사는 사람에겐 고향이 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의미가 조금씩 더해지는 단어가 고향이다.

난 결혼해서 분가할 때까지 주소가 한번도 바뀐적이 없다.

향집 안방에서 태어나서 청년이 될때까지 산밑의 흙집이 우리집이었다. 위쪽의 본체만 있었는데 언젠가 밑에 벽돌로 아래재를 지었다.

초가지붕에서 슬레이트로 개량된 건 새마을 운동 여파다. 전기는 5학년이 되어 들어왔다.

 

 

그곳에 부모님이 농사 지으면서 살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엔 어머니 혼자서 20년 가까이 계셨다.

타지에서 살다 휴일에 집에 가면, 저쪽 산밑 밭에서 보일락 말락한 점이 보인다.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깨단을 눕혀 놓고 두드리고 계신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고향에 갈 일이 많지 않다. 지금은 빈집이다. 집앞의 밭에는 키보다 큰 풀들이 빼곡히 자라났다. 원시림처럼  우거졌다.

식구들만 아는 시골집 비밀장소에는 아직도 대문 열쇠가 숨겨져 있다. 형제들은 항상 그곳에 있는 열쇠로 집안으로 들어걸 수 있다.

 

89세이신 어머니는 무릎과 팔의 연골이 모두 닳았다고 한다.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도움없이는 일어설 수도 없다. 지금은 누나집 근처의 요양원에 있다. 

어제 새벽에 출발하여 어머니와 오래만에 고향에 들렸다. 어머니는  2년전 거처를 옮긴 후 약 2년 동안 고향에 가지 못했다.

어머니가 다니신 집옆의 교회 목사님과 몇분이 다녀갔고, 친척들도 다녀갔다.

그래서 이들에게 진 빚이라도 갚으려는 것처럼, 고향집에 가고 싶어하셨다.

그러던차에 내 갑상선이 조금 나아지면서 함께 고향에 다녀왔다.

 

새벽 5시 반에 요양원을 출발하여 당진에 도착하니 7가 조금 넘었다.

당진시내를 빙빙 돌면서 밥먹을 곳을 찾는데 문을 연 식당이 별로 없다.

결국 콩나물 국밥집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시골 집으로 향했다.

 

 

빈집은 썰렁해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예전처럼 따뜻한 가을 했살이 마루에 자리를 펴고, 앞산의 산마루위에 펼쳐진 가을 하늘이 시원하다.

이제 이곳 집은 상속자인 큰형님이 처분할 계획인것 같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그리한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다.

내가 태어난 곳, 자라난 곳, 꿈꾸고, 사춘기를 보낸 고향이 쓸쓸하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고 시대는 변해간다.

그저 순응하는 길밖엔 없다. 허전하다.

 

집뒤 선산의 아버지 산소와 조부모 산소를 들러 추석에 인사드리지 못한 것을 대신했다.

집안으로 돌아오니 기도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울면서 기도하고 계셨다.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과 오래만에 고향에 돌아온 감정이 섞인 서러운 기도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더하여 아들들에 대한 원망도 묻어났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교회 사택에 들러 목사님을 뵙고, 작은 아버지댁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6촌 형님과 형수님은 80이 넘었는데 어머니가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작은댁으로 와서 이런 저런 얘기를 어머니와 나누셨다.

오래만에 친척을 보니 반가우셨을 것이다.  

 

내가 청년이 될 때까지 주소가 변치 않았던 마을도 이제는 많이 변했다.

외지 사람들도 많아졌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집의 모습들은 대부분 변했고, 집들을 새로 지으면서 집터가 변하여 어디가 누구네 집인지 모르는 집들도 있다.

 

고향에 자주 갈 일이 없어졌다. 그래도 마음엔 그 고향이 항상 머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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