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봄
시간이 옆집의 개울가 물 흐르듯이 무정하게 흐른다. 어제는 남녁 지리산 악양에서, 홍매화가 겨울동안 참아온 붉디 붉은 눈물을 양지바른 언덕에 몸을 기대고 하염없이 흘리고 있었다. 지난 겨울바람속에서도 몸속에는 붉은 빛이 피가되어 흐르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제는 곪아버린 마음이 한이되어 붉은 눈물이 나오는 걸까. 시간이 흐른다. 내 주머니의 동전들만 곶감 빼먹듯이 한닢 두잎 사라질뿐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변하고, 단지 나는 그냥 있을 뿐이다.
지리산 주변에도 바람이 불었다. 섬진강 줄기를 따라 불어가던 바람이 피아골에도 화개 골짜기에도 들렀고 또 조금 내려가다가 악양들판에도 바람을 나누어 주고, 다시 흘러갔다. 따라가던 작은 구름은 이내 흩어졌다. 바람이 들른 계곡들, 들판의 작은 언덕에는 푸른빛의 봄이 내려앉아 땅에서 땅으로 초록색 물감을 엎지른 듯 스믈스믈 퍼져가고 있음을 보았다. 그래도 악양의 누런색 들판이 아직은 바람에 쓸쓸해 보인다. 봄이 아직은 작은 몸으로 오셨나 보다.
나는 구례에서 점심을 먹고 수원으로 4시간에 걸쳐 돌아왔다. 지리산의 아름다운 풍경은 아직 내 머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지리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나는 여전히 느낀다. 초면에 밭에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설봉님 부부), 방에 들어가 고로쇠물을 주신 할머니, 감밭에서 일하다 차를 주신 아저씨. 4시간만에 이러한 기억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그것들은 생명 없는 화석처럼, 빛 바랜 흑백의 기억으로 변해 갈지도 모른다. 내가 할 일은 알츠하이머병이 나에게는 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밖에는, 내 호주머니에서 곶감처럼 빠져나가는 동전들을 잡을 수는 없다. 시간이 흘러간 자리엔 아름다운 기억은 그대로, 나를 떠나 나를 빈곤하게 한 너, 동전꾸러미, 너의 기억은 쓰나미처럼 사라져 버리기를....이 봄이 오는 2011년 길목에서 허공에 소리쳐 본다...여전히 메아리는 오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
지리산 최도사집(작년)
지리산 최도사집 마당의 연못과 연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