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다크
여울처럼.
여울처럼 부족한 듯, 아쉬운 듯 살아갈 것이다. 삶이 푸른 잎사귀와 돌부리를 스쳐 흐를 때 비로소 맑고 아름다운 운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울이 도달한 후의 호수란 행복이 아니라 권태이며 위장된 평화다. 하늘은 부족한 듯, 아쉬운 듯 잠 못 이루는 삶을 위하여 그리움이란 묘령의 정령을 내려 채워 주셨다. 모름지기 삶이란 여울처럼 그리움을 동반할 때라야 행복한 것이다.
< 라다크, 그리운 시절에 살다 - 화가 최용건>
라다크하면 떠오르는 책이 있다.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여사의 책이다. 또 하나,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다람살라에서 20년 이상 수행하며 머물고 있는 청전 스님도 생각난다. 청전 스님은 오지인 라다크에 온갖 구급약들을 모아 전달해 준다고 한다.
오지나 가난한 마을을 읽으면 언제나 내 어릴적 고향에 대한 향수가 묻어난다. 그때는 현실이었고, 지금 읽거나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이다. 가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현실을 미화하기에는 미안한 일이다.
가정을 이루고 이를 유지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세 사람이 전부인 집에서 생활 하는데도 나는 매일 돈 벌 궁리만 한다. 가정을 이루었으니,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는 산이나 숲속으로 들어가서 허름한 오두막에서 혼자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몇 십년을 열심히 생활해 본 결과, 그냥 조용히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외국에서도 머물러보고, 수출 업무하면서 해외 바이어들과 교류도 해보고, 맛난 음식과, 외국의 그럴 듯한 호텔에 머물면서 헛소리도 해보고... 다 지나가면 사라지는 것이다. 호텔에서 자나 볏집 깔고 헛간에서 자나 나에게는 별 차별이 없었다. 오히려 어렸을 적, 동네 머슴이 사는 방에서, 어지러진 방에서, 놀다가 잠자든 생각이 훨씬 아름답다.
나도 부족한 듯, 아쉬운 듯 그리움을 동반하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