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키르키즈스탄

키르키즈스탄에서, 1998년 5월 (2)

자작나무. 2021. 7. 3. 16:53

비쉬케크에서 사업 아이템을 찾아서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일을 만들어 나갈지 언뜻 언뜻 생각하면서, 사업을 시작할 만한 아이템을 찾기 위해서 이곳 저곳 시장에도 찾아가서 살펴보고, 정부 기관에도 찾아가서 문의했다, 상공부인지 고위 관리가 나와서, 그 나라의 기업 중 우리와 거래할 수 있는 업체라며, 회사를 추천해 주었는데, 그 나라에서 제일 큰 회사인 백화점이었다. 그 정부 관리가 백화점 사장에게 내용을 통지하여, 그 백화점 사장과 며칠 후로 미팅 일정을 잡았고, 통역인 굴루나를 데리고 가려고 계획을 세웠다.

 

Y사장은 우리에게 친절했고, 그는 우리에게 그의 사업장으로 놀러오라고 했다. ‘똑따굴라시장으로 오면 된다고 했다. ‘딱따굴라똑따굴라등 비슷한 발음을 택시 기사에게 연이어 내뱉자 그가 알았다는 신호를 했다. Y사장은 IMF로 망한 한국의 빠찡꼬 기계를 들여와, 이곳에서 영업을 하면서, 동시에 당구장도 열어 놓고 있었다. 키르키즈스탄의 수도 비쉬켁크에는 대략 100명의 한국 사람이 와 있다고 했으며, 대개 오락실, 빠찡꼬, 식당, 옷가게, 안경점, 백화점의 점포, 중고차 판매, 호텔 나이트클럽 등을 하고 있었다.

 

 

                                                                    비쉬케크의 벡화점

 

 

놀라운 것은 크지 않은 사업장에 직원이 10명 정도라는 것이었다. 당구장에 손님은 없고, 직원 여럿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비서겸 통역인 자밀라의 삼촌은 Y사장의 운전기사라고 했다. 아무리 급여가 적다고 하더라도, 손님보다 직원이 많아 보이는 사업이 성공할리 만무해 보였다. 똑따굴라 시장은 남대문 시장 격인데, 서민층이 대부분인 장소에, 사행성이 농후한 빠찡꼬나 당구를, 10 만원도 안되는 임금을 받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건지, 도무지 머리가 헷갈리기는 여기서도 마찬가지였다. 참 오묘한 곳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멍한 머리에, 알맞게 새겨 두었다.

 

똑따굴라 - 거리 이름인지 뭔지 모름, 그냥 택시기가에게 '똑따굴라'라고 하면 그곳으로 데려다 줌 - 시장은 허름했지만 매우 컸는데, 가지가지 과일에다 곡류, 반찬, 육류, 물고기, , 옷가지 등 모든 것이 있는 남대문 시장이었다. 엄청나게 큰 메기가 눈에 띄었다. 바다가 없는 나라지만 물고기가 많았다. 특이한 것은 그곳에서 우리를 보고 한국인 임을 단박에 알아보는 무나 오이 짠지 같은 반찬을 만들어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스탈린의 이주 정책으로 그곳에 내동댕이 쳐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는, 고려인들의 후손이었다. 먼 나라에서 슬픈 역사를 가진, 같은 동족을 만나니 기뻤으나 기분이 좀 이상했다. 서툴렀지만 한국어를 할 줄 알았다. 그 후로도 시내를 걷다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단오날 아니냐고 했다. 나는 생각지도 않는 단오를 그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다. 컨테이너 가게가 수백 개가 넘는 시장에 갔을 때도, 어느 아저씨와 아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자기의 할아버지는 경상도 어디 출신이라고 서툴게 말했다. 생각보다 한국 동포를 만나기가 어렵지 않았다. 2만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키르키즈스탄의 작은 정주영 

 

Y 사장의 직원들이나 그 나라 대부분의 장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 내 친구를 마치 사업가 정주영처럼 대했다. 나는 사실 여기 오기 직전에는 공공근로사업으로 끼니를 해결하다가, 이곳에 와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러 온, 가진 것 없는 사람일 뿐이었지만, 그러지 말라고 해도, 공산주의에서 갓 독립한 가난한 나라의, 그들 눈에는, 한국 사람은 모두 작은 정주영이었던 것이다. 말끝마다 Sir를 붙였고 고개를 조금씩 숙여서 예의를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정주영인가보다 그런 생각도 들고, 그냥 그런 상황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작은 정주영이 키르키즈스칸에는 100 명쯤 되던 시절이었다.

 

                                               비쉬케크 시내 정육점 - 어렸을 때 우리나라도 이랬다.

 

어느 날 소개받은 중고차 딜러와 함께, 시내의 중고차 매매시장을 둘러보게 되었다. 한국에서 중고 자동차를 들여와서 이곳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는지 상황을 판단해보려는 의도였지만, 중고차는 이곳에서도 넘쳐나고 있었다. 그 중고차 딜러도 우리를 정주영으로 대했다.

 

예정에 없던 일정으로, 그는 우리를 좋은 사업거리가 있다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가 데리고 간 건물은 육중하고 오래되어 퇴색되어 있었으며, 안에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지 컴컴했고,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갑자기 들어가서, 동공의 초점이 사물에 맞추어 가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어둠속 시간이 지나고 서서히 선반 밀링 등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이지 않던 시커먼 노동자들도 땅바닥 여기저기 앉아 있는 것이 동시에 그림자처럼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의도치 않게 정주영 회장님이었고, 그들은 애타게 회장님의 투자를 기다리는 상황에 맞딱뜨린 것이다.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공장 내부를 투어했다.

 

도망치고 싶었다. 갑자기 머리가 또 멍해지고 이건 또 어떤 상황인지 빠르게 정리할 수 없었고, 같이 간 친구도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

 

그 중고차 딜러는 말했다. 이곳은 애초 소련의 군수 공장이었고, 현재는 만들 것이 없어서 공장이 가동 중지 상태로, 노동자들이 이렇게 놀고 있으니, 투자를 하면 자전거 등 뭐든지 최고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그러니 투자를 할 수 있는지 검토해 달라.

 

그럼에도 그들에게 한국인은 모두 정주영이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난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뭐하는 기계인가요 ? 지금은 무엇을 만들고 있나요 ? 기계는 모두 가동이 될 수 있는 상태인가요 ? 한번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나갑시다.”

 

그러는 중에도 난 속으로 기도했다. 빨리 이곳에서 이 상황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난 공공근로사업 하다가 이곳에 왔는데, 내가 어떻게 투자를 할 수 있겠는가 !  한편으론, 일이 없어서 땅바닥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안타깝기도 했다.

 

 

                                                      유르트 - 몽골의 게르 같은 키르키즈 유목민 거주지

 

현지 여대생, 굴루나

 

뭔가 정보를 알아내든지, 거래를 할 수 있는 파트너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언어가 통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그 곳 사람들은 러시아어와 키르키즈어만 할 줄 알았다.

 

그날도 도토리나무 공원의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옆에서 대학교 여학생들이 시험 공부를 하는지, 미국의 교육제도가 초등학교 몇 년제, 중학교 몇 년제.. 대학교 몇 년제 등 학제를 외우면서 서로 묻고 답하는데,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그들에게 말을 해 보니, 그들도 외국인이 궁금한지 생각 외로 상냥하게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한 명에게 혹시 아르바이트로 통역을 해 줄 수 있는지 물었고, 100 달러를 주겠다고 하니, 잠시 생각한 후 그러겠다고 했다. 가끔 시간 날 때만 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굴루나로 얼굴 색이 희고, 미인이었으며, 러시아계가 아닌 키르키즈민족이었다. 영문과 3학년으로 엄마는 의사이고 아버지는 퇴직했으며, 그녀에겐 약혼한 애인이 있다고 했다. 키르키즈에서 대개 여자는 16, 18살이면 결혼을 하므로, 2122살 된 대학생 글루나는 늦은 나이였다. 전통적으로 조혼의 풍습이 유지되고 있고,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 계층은 약혼 상태로 있다가, 조금 늦게 결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굴루나는 나이에 비해 어려보이지 않고 노련해보였다. 그녀에 의하면 그 곳에서는 여자를 잡아가서 결혼하는, 약탈혼, 즉 우리의 ‘보쌈같은 풍습이 있다고 했다

 

가끔 시간을 내어 시내의 관광 명소나, 볼거리가 있는 거리를 찾아 다녔다. 워낙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곳에 갔고, 그 나라의 글자를 한글자도 읽을 수가 없어서, 큰 동상이 있는 광장에 가면, 누군가 위대한 사람이 있나 보다, 아니면 여기가 좋은 곳인가 보다 하면서 그냥 수박 겉 할 듯이 건물과 거리와 나무들을 찾아다녔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들로, 가끔 보이는 샤슬릭이라고 부르는 꼬치가 있으면 사서 먹었는데, 음식을 잘 못 먹는 친구는 그 꼬치는 잘 먹었다. 굴루나와 함께 시내나 주변을 돌아 다닐 때면, 그곳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지만, 그곳에 대한 기본 배경 지식이 없어서 이해하기는 쉽지 않았다.

 

                                                    키르키즈 전통 모자를 쓴 분이 양을 잡고 있다

 

 

글루나는 가끔 그녀의 학교 친구와 함께 오기도 했다. 그녀의 친구는 키가 크고, 검붉은 머리를 가진 백인과 키르키즈족의 혼혈 여성이었다. 굴루나와 식당을 함께 갈 때는 그녀가 음식을 골라주고 설명을 해 주기도 했는데, 대부분 느끼해서 입맛에 썩 내키지는 않았다. 어느 날 글루나는 자신이 우리에게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해서 같이 갔다. 자기나라 전통 음식이라고 하면서 주문했는데, 칼국수인지 수제비인지, 아무튼 낮설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어떤 음식에든 모두 넣어 먹는, 해바라기 기름을 너무 많이 넣어서인지, 비릿하고 먹기가 무척 거북스런 맛이 났다. 그리고 물에 식초같은 것을 타서 놓고 소스라고 하면서, 넣어 먹기도 했는데, 우리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나는 글루나를 생각해서 맛있다고 하면서 모두 먹었지만, 비위가 약한 친구는 먹지 못하고 난처해 했다. 난 장난으로 야 맛 있는데 빨리 다 먹어라고 했고 친구는 난처해 했다.

 

( To be continued...)